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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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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연수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기업을 운영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1896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직뉴와 경성방직 간부로 근무했다. 1924년 삼수사(현 삼양사)를 설립하고, 1929년 김성수와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9년 양영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해방 이후에는 삼양사 경영에 집중하여 제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경제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축적한 자본으로 해방 이후에도 경제 권력을 유지했다는 비판과 독과점, 정경유착 등 재벌 중심 경제 구조 형성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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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189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연수
원래 이름金延壽
출생일1896년 10월 1일
출생지조선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타계 장소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타계일1979년 12월 4일
학력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상학과 학사
종교개신교(장로회)
배우자박하진
자녀김상협(차남)
부모김경중(부)
장흥 고씨 부인(모)
전직언론인 겸 기업가
삼양사 명예회장
친인척조부 김요협
백부 김기중
김성수
사촌 형제 김재수

2. 생애

김연수는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였던 하서 김인후의 13대 후손으로,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대지주인 김경중과 장흥 고씨 부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 김성수는 4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 김연수가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 선조들은 전라남도 장성군에 대대로 살았으며 증조부 김명환(金明煥)의 셋째 아들인 김요협이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이주해오면서 고부군에서 살게 되었다.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간부로 근무했다. 1924년삼양사의 전신인 삼수사를 설립했다. 1925년부터는 학교 경영 및 언론사 운영 등으로 사회 활동에 나선 김성수를 대신하여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을 주도하였다. 1929년 형인 김성수와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1939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육영재단인 양영회를 설립해 인재 양성 활동에 힘썼다. 같은 해 만주 지역에 남만방적을 설립해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에 진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경성방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삼양사 경영에 집중하며 1956년 울산 제당공장을 건설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69년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완공해 국민의 의·식·주 해결에 이바지했다. 1968년에는 수당장학회를 설립해 장학사업의 폭을 넓혔다. 2005년 수당재단은 수당상을 제정하는 등 활발한 연구지원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김연수는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경제협의회 회장을 맡는 등의 활동으로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 철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1979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생애 초반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대지주인 김경중과 장흥 고씨 부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 김성수는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김연수가 사실상 장남 역할을 했다.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였던 하서 김인후의 13대 후손으로, 선조들은 전라남도 장성에 대대로 살았으며 증조부 김명환(金明煥)의 셋째 아들인 김요협이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이주해오면서 고부군에서 살게 되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간부로 근무했다. 1924년삼양사의 전신인 삼수사를 설립했다. 1925년부터는 학교 경영 및 언론사 운영 등으로 사회 활동에 나선 김성수를 대신하여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을 주도하였다. 1929년 형인 김성수와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1939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육영재단인 양영회를 설립해 인재 양성 활동에 힘썼다. 1939년에는 만주 지역에 남만방적을 설립해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에 진출하기도 했다.

2.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성방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삼양사 경영에 집중하며 1956년 울산 제당공장을 건설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69년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완공해 국민의 의·식·주 해결에 이바지했다. 1968년에는 수당장학회를 설립해 장학사업의 폭을 넓혔다. 2005년 수당재단은 수당상을 제정하는 등 활발한 연구지원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김연수는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경제협의회 회장을 맡는 등의 활동으로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 철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여받았다. 1979년 84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일사망일활동사항
할아버지김요협1833년1909년
할머니연일 정씨1831년1911년
아버지김경중1863년1945년 4월 27일
어머니장흥 고씨
형님김성수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2대 부통령
형수고광석1886년1919년
형수이아주1899년 8월 24일1968년 9월 11일
부인박하진
장남김상준1918년 6월 4일2004년 9월 10일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김상협1920년 4월 20일1995년 2월 21일국무총리
삼남김상홍1923년 12월 17일2010년 5월 23일삼양사 명예회장
손녀김유주1950년 10월 2일-
손자김윤1953년 2월 24일-삼양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손자김량1955년 6월 1일-삼양홀딩스 부회장
손녀김영주1958년 10월 16일-
사남김상돈1925년 2월 24일사망전 삼양염업 고문
오남김상하1926년 4월 27일2021년 1월 20일삼양사 대표이사회장
육남김상철1938년 4월 25일2007년 2월 21일
칠남김상응1946년 3월 29일2002년前삼양사 대표이사회장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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